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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과 베르사유, 도쿄 - 도시 속에 새겨진 권력과 철학의 세계사 비교
    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5. 25. 21:31

    권력은 공간을 통해 말한다: 도시 계획의 의미

    도시 게획은 단순한 공간읭 배치나 기능적 구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 통치의 이상, 권력의 구조, 사회 질서에 대한 통치자의 철학이 물리적 공간으로 구현되는 과정입니다. 세계사 속 수많은 수도들 가은데 특히 주목할 만한 세 곳, 조선의 한양, 프랑스의 베르사유, 일본의 도쿄는 각기 다른 문명과 시대의 정점에서 건설되었지만 공통적으로 '도시를 통한 권력의 시각화'라는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사례입니다.

    한양은 조선이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려는 시도에서 탄생한 수도로, 조선 왕조의 정치철학과 세계관이 도시에 정교하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강화와 귀족 통제를 목적으로 설계된 '왕권의 연극장'이자 프랑스 바로크 건국과 미학의 정수였습니다. 도쿄는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일본이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며,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새롭게 구축한 수도입니다. 이들 도시는 단지 권력의 중심지가 아니라, 특정 이념과 질서를 재현한 상징적 공간이자 시공간적 선언이었습니다.

     

    한양: 유교 정치 철학을 품은 공간

    한양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상을 공간화한 유례없는 계획 수도였습니다. 1394년 태조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의 수장 정도전은 개경 대신 새로운 수도 한양을 택하며, 도성 건설을 통해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한양의 중심에는 경복궁이 위치하고, 그 전면에는 육조거리가 동서로 뻗어 있어 국왕과 관료 집단의 질서 있는 관계를 공간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종묘와 사직은 경복궁의 좌우에 배치되어, 조상과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 제사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도성 외곽을 둘러싼 한양도성은 내사산(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배치되어 자연 지형과 천문 지리를 조화롭게 수용하였습니다. 이는 풍수지리뿐 아니라 하늘이 임금에게 냐린 명(天命)을 담보로 한 통치 정당성을 시각화한 구조였습니다.

    한양은 이러한 설계를 통해 유교 정치철학의 질서, 조상숭배의 계승, 신분제의 위계, 도덕 중심 사회라는 이상을 담고 있었습니다. 세계사 속 다른 수도들과 비교해볼 때 이처럼 특정 정치 이념을 도시 구조 전체에 일관되게 투영한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 오늘날에도 한양은 동아시아 유교 국가의 도시 설계 전범으로 연구되며, 조선의 도시 계획이 지닌 상징성과 일관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산입니다.

     

    한양도성 남산 지역
    복원된 한양 도성 남산 지역

     

    베르사유: 절대왕정의 무대, 미학과 권력의 동시 구현

    프랑스의 베르사유는 도시라기보다는 절대왕정이 시공간 전체를 통제하기 위해 기획한 하나의 정치적 무대였습니다. 루이 14세는 파리의 혼란과 귀족 세력의 영향력을 탈피하고자 수도 기능을 베르사유로 옮겼습니다. 1661년부터 본격적으로 확장된 베르사유 궁존과 도시 구조는 방사형으로 뻗는 도로망과 정원, 대칭적 건축물들을 통해 국왕을 중심으로 한 질서와 시각적 위계를 표현했습니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 정면에서 퍼져나가는 방사형 도로는 '태양왕'이라는 루이 14세의 별명을 시각화하는 구조로, 모든 길이 왕에게로 향한다는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베르사유는 귀족들을 한 곳에 모아 권력을 견제하고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정치적 장치로도 기능했습니다. 이 궁정 중심의 도시 게획은 정치 공간과 생활 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일상이 왕의 통치 체계 안에 포함되도록 구성되었습니다

    베르사유는 유럽 각국에 모범이 되었고, 이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오스트리아 쇤브룬, 심지어 독일의 뷔르츠부르크 궁전 등 많은 도시들이 베리사유식 모델을 차용했습니다. 도시가 하나의 '정치적 극장'이자 '권력의 미학'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베르사유는 세계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도쿄: 근대 일본의 제국적 야망이 투영된 도시

    에도시대 도쿄는 도쿠가와 막부의 중심지로, 성과 주변 사무라이 구역, 상업 지구가 구분된 방어형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에도는 도쿄(東京)로 개명되고, 일본의 새로운 수도로 지정되며 대대적인 도시 재구성이 시작됩니다. 메이지 정부는 근대적 제국 국가의 수도로서 도쿄를 서구화된 구조로 설계하고자 하였습니다.

    중앙에는 황거(고쿄)가 자리하고, 이를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망이 펼쳐지며, 유럽식 관청과 군사 시설, 상징적 기념물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이 구조는 베르사유식 모델을 차용한 것이며, 일본이 제국으로 성장하고자 했던 의지가 공간 설계에 반영된 것입니다. 도쿄는 메이지 헌법 체제의 중심이자 군사, 경제 권력의 응축지로 기능하였으며, 근대 국가의 시각성과 위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했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은 도쿄 재설계의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도시계획은 더 기능적이고 근대적인 방향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 점령기를 거치며 도쿄는 다시 한번 재건되었고, 이때의 도시 계획은 민주주의와 지본주의 중심의 새로운 도시 철학을 반영했습니다, 도쿄는 제국의 수도에서 글로벌 금융과 행정 중심지로 이행하면서 도시의 정체성과 공간 구조 역시 지속적으로 변모해왔습니다.

     

    도시 속 세계관의 충돌과 공존

    한양, 베르사유, 도쿄는 시대와 문화가 전혀 다르지만, 모두 도시라는 공간을 통해 권력의 형식과 내용을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한양은 유교적 도덕정치의 구현 공간이었고, 베르사유는 절대왕정의 위엄과 통제의 상징이었으며, 도쿄는 제국주의와 근대화가 혼합된 복합적 정치공간이었습니다.

    이들 도시는 각각의 문명 속에서 권위, 상징, 효율, 통치를 설계하고 시각화한 대표적 모델입니다. 나아가 이 비교를 통해 우리는 동양과 서양, 전근대와 근대, 전통과 개혁 사이의 공간적 사유 방식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건축적 또는 미학적 비교를 넘어 인간이 권력을 어떻게 구성하고 공간에 투영해왔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금 도시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스마트시티, 생태도시, 탈중심화된 카뮤니티 도시 등 새로운 이상이 제시되고 있지만, 도시가 철학과 권력의 산물이라는 본질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한양(서울), 베르사유, 도쿄 같은 도시를 돌아보는 일은 미래 도시를 설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성찰의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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