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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온 이슬람 상인들 - 고려시대의 세계 무역과 문화 교류세계사 속의 한국사 2025. 6. 3. 23:59
고려시대와 세계 해상무역의 중심, 실크로드와 바닷길
고려시대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세계와 교류한 활발한 국제무역의 시대였다. 특히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고려는 송나라, 원나라, 일본은 물론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지역 상인들과도 무역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무역은 중국 동남 연안을 따라 이어진 해상 루트와 함께, 아라비아반도와 인도를 잇는 인도양 루트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슬람 상인들은 그 루트를 따라 동남아시아, 중국을 거쳐 고려에까지 도달했고, 이는 고려가 단지 한반도 내의 왕조가 아닌 세계 해양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슬람 상인들은 향료, 약재, 보석, 유리 제품, 코란 등 이슬람 문화를 담은 물품을 들여왔고, 고려에서는 금, 은, 인삼, 직물, 종이, 고려청자 등을 수출했다. 이처럼 고려의 해상 무역은 단순한 물자 교환에 그치지 않고 문화와 종교, 기술까지도 함께 교류하는 복합적 상호작용의 장이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송나라와 원나라를 거쳐 고려로 들어왔으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그들이 드나들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이었다. 사진은 실크로드. 고려에 발을 디딘 이슬람 상인과 사절단들
고려시대 한반도에 실제로 이슬람 상인이 입국했다는 기록은 <고려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024년, 1025년, 1036년에는 아라비아에서 온 상인들이 고려를 방문하였으며, 이들은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와서 정식 외교 사절로 예우를 받았다. 특히 1024년에는 아바스 왕조의 사절로 추정되는 이들이 고려에 들어와 예물과 사절단을 교환하며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슬람 상인들은 대개 송나라와 원나라의 항구도시를 경유해 고려로 들어왔으며,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는 그들이 드나들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이었다. 벽란도는 고려의 수도 개경 근처에 위치하면서도 해상 교통이 편리해 다양한 외국 상인과 통역관들이 모여드는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이들은 단순히 무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지에 정착하여 고려사회에 동화되기도 했다. 일부 상인들은 귀화하여 고려 귀족과 혼인하거나,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 예로 고려시대에 활동한 사마르칸트 출신의 귀화인 이야기는 구전으로 내려오며, 이슬람 문화의 실질적 전파를 뒷받침한다.
고려 문물 속에 스며든 이슬람 문화의 흔적
이슬람 상인들의 방문은 단순한 상업 활동을 넘어서 고려 문화 전반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예가 향료와 유리 공예품의 도입이나 고려 전기부터 중기까지의 귀족 문화에는 아라비아산 향료와 보석이 유행했으며, 당시 고분에서 출토된 이국적 유리잔과 문영은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시사한다.
또한 고려 불화와 청자에서도 페르시아나 중앙아시아 계통의 문양이 발견되곤 한다. 청자의 문양 중에는 육각형 기하무늬, 종교적 상징물 등 이슬람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관찰된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도안은 중국을 거쳐 고려에 전래되었고, 고려 장인들은 이를 창의적으로 변형하여 독창적인 미술로 승화시켰다.
음식 문화에서도 이슬람 문화의 간접적 흔적이 발견된다. 예컨대, 육류를 고기말이 형태로 익히는 방식이나 향신료를 활용한 음식 조리법은 중앙아시아풍의 전통과 흡사한 점이 있다. 이는 이슬람 문화권 상인들과의 지속적 교류 속에서 음식 기술이 이식되었을 가능성을 열어준다.
벽란도, 동아시아 속 세계의 시장이 되다
고려의 대표적인 국제항인 벽란도는 고려판 알렉산드리아라 불릴 만큼 다채로운 인종과 문물이 뒤섞인 곳이었다. 이곳에는 송나라 상인, 일본 상인, 아라비아 상인, 중앙아시아인, 몽골계 통역사까지 다양한 외국인이 드나들었다. 특히 벽란도의 모습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같은 시기 동아시아 국제무역의 현장을 그려보는 데 중요한 모델이 된다.
벽란도에서는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고, 고려 정부는 통역관 제도를 정비하여 외국인과의 원활한 교류를 도왔다. 국가는 벽란도에 무역세를 부과하고 교약품을 감시했으며, 필요 시 외국인을 위한 숙소도 제공했다. 이곳의 활발한 국제 활동은 고려가 고립된 왕조가 아닌, 동시대 세계의 흐름 속에 참여한 해양 왕국임을 보여준다.
세계사 속 고려 - 문을 열고 세계를 품다
세계사적으로 고려시대는 중세 유라시아 전역을 연결한 거대한 교류망 속에 있었던 시기였다. 이는 단지 송나라나 원나라와의 교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를 포함한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까지 확장된 국제 질서의 일원이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고려의 국제성을 고분 유물이나 사서, 미술품 등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만, 당시 고려 사람들에게 이슬람 상인들과의 만남은 단지 외국인 방문 이상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새로운 문명, 미지의 신앙, 낯선 음식과 기술을 통해 세상을 더 넓게 이해하는 경험이었다.
이슬람 상인들은 그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려인에게 세계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이야기꾼이자 문화의 전달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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